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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무. "화란 개혁교회가 주는 주일성수의 교훈"
 

"화란교회가 주는 주일성수의 교훈"

(2001,3월 목회와 신학)

                                                        

유해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성경의 명령이다. 그러나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 성경은 세세한 부분에까지 지침을 주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신약교회와 성도들의 자유의 문제이다. 이 자유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일의 성취가 전제되어 있고, 성령님 안에서 성숙한 자로서 누리는 자유에 걸맞는 책임이 뒤따른다. 한국과 화란교회의 주일문화를 단순하게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비교를 통한 유익이 없지는 않겠다



1999년 화란

필자는 1983년 초반에서 90년 중반까지 유학하였던 화란에서 1999년 한해를 연구년으로 보냈다. 그간의 세월동안 화란은 전반적으로 많이 변했다. 옛 지인들과 교인들은 나에게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다고 느끼는가를 자주 물었다. 그러다 보니 필자는 단순한 느낌 이상으로, 변화를 반성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화란 도로에 새 차들이 많이 달린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그것도 새 차들이. 이전에 화란사람들은 근검 절약하였고, 경제적 능력과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형차를 주로 탔었다.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자동차 중과세와 비교적 비싼 기름값에도 불구하고, 화란의 도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빛났다. 화란 경제가 너무나 잘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운전 습관도 거칠어졌다. 모두가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는 듯, 왕복 2차선에서도 추월을 하고, 신호를 지키지 않는 운전자도 자주 눈에 띄었다. 자동차보다는 자전거를 선호하는 화란인들이기에, 항상 여유를 가졌고, 자동차와 보행자가 없는 새벽 두시에도 교통신호는 꼭 지키던 그들이었다. 이제는 할머니조차도 자나가는 자동차가 없으면, 보행자와 자전거 통행인을 위한 신호조작단추를 누르지 않고, 그냥 통과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필자는 10여년 사이에 화란인들의 성격이 더 급해졌고, 차츰 인간의 근원적인 연약한 모습을 이들도 들어낸다고 혼자서 들먹거렸다.

교회 안에서 나타난 현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직분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화란교회의 장로와 집사는 임기 3년 또는 4년으로 선출되며, 대개 연임을 한 뒤에, 적어도 1년 이상은 직분에서 휴식을 취한다. 목사의 설교를 살피고 교인들이 설교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실천하는가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장로는 바빙크의 「교의학」 4권을 읽어야 하고, 성경 주석 한질은 꼭 비치해야 할 만큼, 장로직에 대한 요구는 컷으며, 모두가 장로직을 흠모하였었다. 그러나 장로는 매 월요일 저녁에 당회에 참석해야 하며, 교인들을 정기적으로 심방해야 한다. 말하자면 명예직이 아니라, 일하는 장로, 그것도 ‘장로 격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들을 선임할 때에는 당회가 복수 추천을 하는 것이 수백년간의 관례였었다. 그런데 2년 전에 가서 보니, 장로 후보들이 부족하지 않는가. 연쇄적으로 집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유 가운데서, 화란 경제가 너무 좋다는 것이 제일 뚜렷한 이유였다. 장로가 되면 부인과 자녀들이 불평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10년전만 하여도 대부분의 여성도들이 전업주부였는데, 이제는 교회 안에 있는 여러 사역들에 자원하여 봉사하는 여성도들을 찾기가 힘들어졌단다. 여성을 위한 일거리가 많이 있을 뿐 아니라, 화란정부가 남편만 일할 때보다, 부부가 일할 경우 더 많은 세제 혜택을 주기 때문이었다. 경기는 너무 좋고 일손은 부족하니까 나온 궁여지책이라는 즐거운 비명이라고나 할까.



1980년대의 화란의 주일 풍경

우리는 지금 주 5일제 근무에 따르는 교회의 대책을 고민하고 있다. 화란의 경우 이미 50년대 말에 이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른 여가 선용으로 인하여 교회는 타격을 많이 받았다. 특히 주일 예배 참석율이 크게 감소된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에 관광지에 있는 상점의 영업이 허용되었다. 1991년에야 비로소 주일에도 TV광고가 허용되었다. 이만큼 화란은 기독교적인 사회였었다. 1900년대에 교회에 적을 두지 않는 것은 신앙적으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사회적인 소외 현상이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교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고 놀라운 사실로 비쳐지고 있다.

필자가 유학하던 시절만 하여도 그렇게 분주하던 도심 상점가가 주일날만 되면, 쓰레기가 늘려있는 삭막한 거리로 돌변한다. 아무도 주일에는 일하지 않고, 청소부도 월요일 아침에나 일찍 거리를 청소하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부터 주일이 가장 복잡하고 바쁜 날로 각인되어 있었던 필자에게는 정말로 별세계를 맛보았다. 종종 주일을 같이 보내려고 지인들이 초청하여서 우리 가족을 데리러 왔는데, 도로에는 차가 아침 내내 거의 달리지 않았다.

교인들은 차를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로 교회로 가거나 아니면 아예 가족끼리 걸어서 간다. 아이들에게는 주일날에만 입는 단정한 옷이 별도로 있을 정도로,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외양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화란 교회에는 주일학교 전통이 없는데, 아이들도 대개 만 3세정도만 되면, 부모와 함께 예배를 참석한다. 자리도 가족 단위로 잡아서 앉는다. 예배 후에는 서로를 집으로 초청하여 커피를 마시며, 설교를 다시 음미하고, 신앙 안에서 교제의 여유를 즐기는 풍습은 부럽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부모는 함께 예배를 드린 자녀에게 목사님의 설교에 대하여 질문하며, 그 이해 정도를 파악하며, 자신이 설교에서 깨달은 바를 다시 자녀에게 전달한다. 그렇게 주일을 보내노라면 시간의 흐름이 갑자기 느려졌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된다. 점심식사 후에는 거리나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산보하는 가족들로 메워진다. 그러다 교인을 만나거나 교인집을 지나치면, 다시 함께 차를 마신다. 비록 한국교회에서 주일날 보는 분부한 움직임과 다양한 모임, 그리고 전도 등의 행사를 화란에서는 보기 힘들었다 하더라도, 주일날 가족 중심의 예배 참석에서 보듯이, 교회와 가정의 안정은 상호 보족적이었다. 철저하게 세속화된 화란 사회 한가운데서도 신실한 성도들은 확실한 주일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이런 주일 문화의 저변에는 가정과 교회를 동일한 언약공동체로 보는 개혁신학 특유의 전통이 자리잡고 있다. 거의 매주일마다 예배 중에 유아세례가 시행된다. 집례목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성령께서 세례받는 자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실 것을 보장한다는 세례의식문을 미리 낭독한다. 그리고 목사는 부모에게 그들의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구원교리를 능력껏 가르치며, 교육받게 할 것인가를 서약한다. 이 약속을 따라서 매일 식사시마다 식탁에서 성경을 읽으며,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여서 자녀들이 교육받게 한다. 이렇게 교육받은 아이들에게도 사춘기나 방황기가 닥쳐오지만, 그들은 세례에 기초한 말씀의 훈육으로 건실한 신자로 성장하고, 대를 이어서 교회를 봉사한다.



24시간 경제 제체

이런 상황에서 이미 1994년경부터 주 6일근무제도 부활이 논의되기 시작하더니, 1998년부터는 아예 24시간 경제체제의 가동을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화란 경제가 너무 성장하는 국면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을 일터로 불러내고, 합법적인 아르바이트로 학생들의 인력까지 동원하여도, 잘 돌아가는 경제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 현상은 특이하다 하겠다. “빵을 그리고는 서커스를 달라”(panem et circenses!)는 로마의 유명한 속담이 있다. 주 5일근무제는 인간의 이런 본성을 잘 제도화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모자라는 인력을 60년대부터 회교권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로 메꾸지 않았던가. 이제는 더 나은 빵과 오락을 위하여 직접 더 많이 일하자는 것이 화란의 현 상황이라 하겠다. 이렇게 일벌처럼 일하면, 어떤 보상을 누리게 되는가? 더 멋진 가구와 더 번쩍거리는 자동차와 그리고 지중해의 일류 호텔에서 수주간 보낼 수 있는 여름 휴가이다.

화란 경제가 이렇게 좋은 중요한 이유는, 이미 1983년부터 시작한 구조조정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인 도전을 대응하기 위하여 화란 정부는 심지어 정부의 구조조정이라는 초유의 단안을 일찍이 추진하였다.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고, 부인들과 학생들의 경제 활동까지 권장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회의 노년화 현상이다. 즉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노동 인구의 감소이다. 생산 인구의 감소로 인하여 선진국에서도 복지 국가를 운용하기 위한 기금이 위협을 받고 있다. 실업 문제의 해결과 노동 가능한 인구의 경제적인 부의 축적이라는 직접적인 목표 외에도, 연금으로 살아가는 노인층의 격증은 생산 인구의 상대적인 감소로 인하여 복지 국가의 틀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란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교회 출석율이 다시 위협을 받고 있다. 이전에는 교인들이 놀러가기 위해서 예배를 참석하지 않거나 직분을 맡지 않으려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는 더 나은 풍요와 안락한 휴가를 위하여 교인들도 토요일 뿐 아니라 때로는 주일날에도 다시 일터로 갈 수밖에 없는 사회, 경제적 체제의 횡포에 직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화란 교회 안에는 주일 성수에 대한 새로운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 정부는 몇년 전부터 일년에 몇 주일날은 상점을 열어도 된다는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상인들 연합회가 예외 없이 상점을 열도록 기독신자인 상점주인과 점원들에게 공개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다. 정부도 특히 외국인 근로자들이 사는 후진 곳에 있는 상점이 주일날 문을 열면, 활기 찬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범죄도 줄어들고,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다면서, 모든 상점들의 전반적인 주일 영업을 가능하게 하는 입법을 시도하고 있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주 5일제 노동을 염려하는 우리는, 다시 주 6일제 근무로 환원할 날도 언젠가는 보게 될 것이다. 여전히 취업 대란과 조기 은퇴, 명예 퇴직 등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에서는 먼 이국의 즐거운 비명정도로만 들려오겠지만, 우리에게도 출생은 격감하고, 노동 인구의 절대수가 부족할 날도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중 고충을 직면하고 있다 하겠다.

IMF사태로 우리는 직장을 잃은 가장이 많아지고, 그들의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부터 우리의 기업 풍토와 근로 환경은 어떤 직종과도 관계 없이, 가정을 위협하였고, 신앙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아침 일직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더라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일날 다시 아침 일찍부터 교회에 와서 봉사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었다. 사실 자녀들과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교훈’으로 훈육하는 가정이 얼마나 되었던가. 가정조차도 경제적 생산과 소비 단위로만 파악하는 일반적 인식이 기독교가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너무 빨리 돌아가는 사회와 직장의 활동 속도 때문에, 주일날에도 그 속도를 반성할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봉사에 전념하였다. 이제, 가차 없는 퇴직 강요와 평생 직장 개념의 파괴 등으로 인하여 모두가 지난날을 반성하기 시작하였다.

주 5일 근무제가 시작되기라도 하면, 교회가 텅텅 빌 것이라는 노파심을 모두가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진지한 반성을 강요받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의 장래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로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힘써 일해야 하는 엿새동안 직장이 요구하는 과중한 업무에다 주일에도 교회는 개인과 그의 가족이 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제는 가정을 배려하기 위하여 기도원이나 전원교회의 역할을 활성화하여, 주말을 그곳에 보내며 예배에도 참석할 수 있게 하자는 식의 제안도 있다. 훌륭한 제안처럼 들리겠지만, 깊은 반성이 선행된 대안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부모와 자녀들이 가정의 규범을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으로 체험하며, 자녀는 언약의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부모의 직분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무이며, 개방과 동시에 폐쇄도 때로는 가정을 위한 보호막이라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사회, 경제적인 요인들의 횡포로 가정이 적절한 목회적 배려를 받지 못했고, 그 가정에서 주일을 지키는 문제를 훈련받지 못한 상황에서 주 5일 근무는 교회의 앞날을 위협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일 성수에 대한 논의 이전에 가정에 대한 목회적 반성과 배려의 부족을 한국교회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주일을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던 과거의 전통에 대한 반발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런 태도가 모든 율법적인 것을 정리하는 성숙한 태도라는 강박적인 사고방식이 뜻있는 성도들 간에 잠재되어 있었다. 일종의 반율법주의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물밀듯 쇄도하는 비기독교적 세력의 위협 가운데서 깊은 반성 없는 처신은 행동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고, 언젠가는 신앙의 기조조차 소멸시키고 말 것이다. 전통에 대한 이러한 자세는 계몽사조에 뿌리를 둔 개인주의적인 삶의 방식과 유사하며, 일종의 이원론에 기초하고 있다. 신앙의 위협을 함께 기도하고 토론하여 대처하지 못하고, 도피적인 자세로 각자가 형편과 처지에 따라 알아서 해결하는 것은 이미 우리 신앙의 큰 기조를 부인하고 있다. 함께 이루는 전통이 없는 신앙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사의 초기에서 나타난다고 여겨졌던 이원론은 성숙한 신앙의 태도를 지닌 성도들에게도 나타난다. 사실 이것은 교회의 역사가 오래된 서구교회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피선교지역에서 신앙이 私的 사안이듯, 기독교 문화가 정착된 지역에서도 신앙은 사적인 사안이요, 세상의 결정이 신앙을 좌우하는 이원론적 경향은 어김 없이 등장한다. 오죽했으면 화란의 한 경제윤리학자는 근본주의로부터 배울 바가 크다고 했을까. 그는 상당히 넓게 수용되는 기조를 지닌 기독교, 즉 16-17세기에 활발했던 칼빈주의와 같은 뚜렷한 원리를 가진 기독교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에 의하면 근본주의에는 가치가 존중되며, 기본 원리들이 있고, 영적 뿌리가 내려져 있고, 신앙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만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집단적인 저항력이 생겨난다. 이런 가치들을 가정에서 배울 때, 개인주의와 이에 의한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근본주의를 논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주일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안식교 교인들에게서 배울 것은 없는가? 우리에게는 주 5일 근무제가 그들에게는 지금 우리가 잘 적응하고 있는 주 6일 근무제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안식일’을 성수하여서 자기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우리가 근본주의자가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신앙의 근본적인 자세를 갖출 필요는 있다.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될 경우, 교회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염려를 할 수밖에 없다. 이를 대처하기 위하여 근본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비난할 수 있을 만큼 가정과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는지를 먼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비난하는 근본주의가 왜 건재한가를 반성하여서, 근본주의나 율법주의보다도 더 강한 삶의 양식과 전통을 창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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