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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무. "육의 부활을 믿사오며"
 

“육의 부활을 믿사오며”

(2001.4. 기독교사상)

유해무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대부분의 교회는 매주일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사도신경은 고대교회의 선포의 내용을 간략하게 잘 요약하고 있다. 후대의 관점에서 보면, 사도신경에 빠져 있는 내용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신앙고백들이 모든 면에서 성경을 완벽하게 요약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의 기본적인 틀은 세례명령(마 28:19)을 따르며, 내용면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관한 기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사도신경의 말미에서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영어권의 진술체 고백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인데, 그 이후 영미권의 개신교회 만이 이렇게 고백한다. 주후 150년경에 형성되어 현재의 사도신경의 모체가 된 로마신경은 ‘육의 부활’을 고백하고 있다. 로마교와 유럽의 개신교회에서는 이 전통을 따라서 ‘육의 부활’을 고백한다. 그리고 ‘영생’의 고백은 후대에 첨가되었다.

그런데 ‘육의 부활’이 신조에 들어온 것을 신약성경에서 떠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즉 영생과 죽은자의 부활은 성경적이지만, 육의 부활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고대교회가 영지주의를 대항하여 육체성의 부활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육의 부활을 주장하였으나,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고전 15:50)1).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판이 일면 진지성을 지니고 있지만, 결정적인 허점을 안고 있다고 본다.



‘죽은자의 부활’ 과 ‘육의 부활’

사실 사도신경은 성경에 나오는 낱말들을 그대로 도입하거나 결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공교회’의 ‘공’에 해당되는 ‘카톨릭’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또 육의 부활을 고백하지만, 육의 부활도 성경에 나오지는 않는다. 이 고백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선포의 내용을 분명하게 따르고 있다. 다만 성경은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 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말한다. 부활, 곧 죽은 자들의 부활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상황에서, ‘죽은 자들’ 대신에 ‘육’이 로마신경에 도입된 것은 뚜렷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대교회의 저자들은 부활 신앙을 확고하게 고수하면서, 변호하였다. 폴리캅(65-155년경)은 “그리스도가 육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요, 십자가의 증거를 고백하지 않으면 마귀의 자식이요, 부활도 심판도 없다는 자는 사탄의 長子이다”라고 강변한다. 이 발언은 부활에 관한 고대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고대교부들의 문헌을 보면, 성경대로 ‘죽은자들의 부활’, ‘몸의 부활’, 그리고 ‘육의 부활’이 다 나타난다. 유스티누스(100-165년경) 역시 죽은자의 부활이 없다고 단언하는 자는 기독신자가 아님을 자청하는 것이라고 못박는다. 타티아누스(110-172년경)는 헬라문화 전체를 논박하는 변증서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여 만물의 완성 뒤에 ‘몸의 부활’이 있을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테오필루스(115-181년경)는 주후 180년경에 친구 아우토리쿠스를 반박하면서, “하나님은 그대의 육을 혼과 함께 不死하게 부활시키시리라... 그대는 죽은자들이 부활하게 될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럴(부활) 때에야 그대는 원튼 원치 않든 믿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2)

그런데 ‘육의 부활’은 빈도수에서 더 많이 나타나며, 저자에 따라서는 오직 이 표현만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로마의 클레멘스(30-100년경)는 예수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을 중거하면서, “당신께서 나의 이 육을 부활시키시리라”(욥 19:26)는 말씀을 인용한다.3) 타티아누스는 혼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하며, 혼은 몸 없이는 나타날 수 없고, 육이 영혼 없이는 부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육의 고리는 혼이요, 육이 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허마스(160년경)는 육이 썩는다(고전 15:53,54 참고)는 생각이 마음에 일어나지 않도록 경성하라고 촉구한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육을 더럽히면(유 8 참고), 성령님까지도 더럽히며, 성령님을 더럽히면, 생명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발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며(고후 7:1), 육의 부활 신앙이 육을 잘 간수하라는 윤리적인 교훈에로 진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最古의 설교라는 제2클레멘스서신은 “육이 심판받지도 부활하지도 않을 것이라 말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聖殿)인 우리의 육을 잘 간수하여야 한다. 애초에 영이셨던 그리스도가 육신이 되셔서 우리를 부르셨으니, 이 육신으로 우리가 영생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강변한다. 또 교회가 그리스도의 육에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육에 교회를 간수하여 더럽히지 않으면, 성령 안에서 다시 교회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도 말한다. 이 말은 교회에 관한 언급이지만, 육에 대한 고대교회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가 육으로 오셔서 육으로 고난을 받아서 죽음을 폐하시고 부활하셨다는 데에서 육이 결코 부정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고대교회가 ‘육의 부활’을 믿을 때 그 근거는 예수님의 육의 부활임을 잘 알 수 있다. 이그나티우스(30-107년경)는 예수께서 육으로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육으로 못박히셨고, 육으로 부활하신 것을 고백한다. “나는 육으로 부활하신 그분을 알며 그러한 그분을 믿는다.”4)

고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과 부활이 그분의 육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깊이 고백하고 있었다. 또 성령론적으로 육을 잘 간수하고 윤리적으로 육으로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육의 부활’의 고백에 대한 현대의 비판과는 달리, 로마신경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고대교회는 이것을 고백하였다.5)



‘육의 부활’: 反이원론적 고백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은 육, 곧 가장 부정적 의미의 육체성에까지 해당된다. 이 고백이 로마신경에 도입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죽은자의 부활신앙은 영혼불멸설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헬라/로마 문화권에서 아주 독특한 고백이었다. 그런데 영지주의(노스틱)와 마르시온은 철저한 영육 이원론에 기초하여서, 육의 부활을 부인하였다. 이들의 이원론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분하면서,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자체를 악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금욕적이며, 영혼의 부활만을 주장할 뿐, 육의 부활을 부인하였다. 이미 폴리캅도 로마에서 마르시온을 만나서 논박하였고, 테오필루스와 유스티누스도 그를 반박하는 글을 썼다. 전자는 현존하지 않지만, 후자는 단편으로만 남아있다. 역시 단편으로 남아있는 부활에 관한 그의 작품은 유독 ‘육의 부활’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부패하고 해체되는 것은 이전의 상태로 회복될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육의 구원과 부활 참여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인간을 생명과 부활로 부르셨다. 인간을 부분으로 보지 않고, 전체로 보려는 그의 입장은 아주 돋보인다. 영혼은 불멸하니 구원과 부활에 참여하고, 육은 썩으니 구원과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논박하였다. 그는 합리적인 논증을 취하지 않고, 바로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로부터 육의 부활을 해명한다. “그리스도가 육의 부활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면, 왜 그가 고난당했던 육신으로 부활하셨겠는가?6)” 우리의 의사 그리스도께서 우리 육을 현명하고 온화하게 다스리신다면, 육을 죄로부터 보호하시고, 구원에 참여하게 하시고, 부활시키실 것이다. 육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과 부활로부터 논증하는 이 입장은, 육의 부활신앙을 철저하게 고수한다. 게다가 이런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이원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교회가 육을 경시하지 않았고, 이원론을 철저하게 거절하였다는 것은 이레네우스(120-202년경)에게서도 잘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진술한다. 물질을 악하다고 보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자들이 있지만, 저들도 육으로 부활하여서, 부활시키신 그분의 능력을 고백할 것이다. 물론 불신앙 때문에 저들은 의인의 수에 들지는 못할 것이다. 이들은 구원이 영혼에만 해당되고, 흙으로 지음받은 몸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구원이 전인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진리의 규범(kanw.n th/j avlhqei,aj)은 주님이 죽은자로부터 부활하셔서 육으로 승천하신 것을 믿으며, 그분이 전인류의 육신을 부활시키려고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 육은 불멸성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육의 부활을 부인하고, 육의 중생을 능욕하는 자들이 허사를 경영한다고 이레네우스는 개탄한다. 만약 육이 구원얻지 못한다면,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피로 구속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성찬의 잔이 당신의 피와의 교제일 수가 없고, 떡도 당신의 몸과의 교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피는 오직 육에서 나오기 때문이다.7) 이와 같이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성 뿐아니라 인간의 전인성,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찬의 관점에서 육의 구원과 부활을 고수하였다.

테르투리아누스(145-220)는 마르시온을 대항하여서, 육의 부활이 부인되면 (신성의 연합)이 뒤흔들리고, 변호되면 (창조주의 신성이) 견고히 설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신앙의 규범’(regula fidei)을 진술하면서, 예수께서 육의 부활을 통하여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것을 고백한다. 그도 간음처럼 몸에 범하는 죄악을 경고하면서, 그 근거로 육의 부활을 든다.8) 고대교회는 선한 창조와 주님의 성육신과 육의 부활을 믿었고, 결코 이원론적이지 않았다.

      

이원론의 배경

비록 다양한 표현들이 가능하지만, 사도신경의 ‘육의 부활’은 육을 경시하는 고대교회 내의 이원론에 대한 장치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그렇다면 이런 이원론, 특히 노스틱이나 마르시온이 육을 경시한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마르시온은 바울의 관점에서 복음서와 성경을 정화하려고 하였다. 성경에 나타나는 육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면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바울은 육과 영을 대비시킨다. 육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을 거스리며(갈 5:17), 육신 안에 있어서 육신을 좇아 사는 삶(롬 8:8,12)은 성령 안에 있어서 성령을 좇아 사는 삶(롬 8:4,9)과 대치된다. 즉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9). 그런 육신은 풀과 같고 그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벧전 1:24). 이처럼 육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서있는 全人을 말한다.9)

이런 식으로 육을 이해하고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예가 고대 저자들에게도 자주 나타난다. “우리가 이생만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면, 혈과 육에 종노릇하면서 유익과 육적 욕망을 따라서 사는 죄를 범한다는 오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가까이서 하나님과 더불어 변화나 정염에서 자유로우면서 영혼을 지닐 것이나 설령 육을 가진다 하여도 천상의 영처럼 지낼 것이다”. 여기서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말씀(고전 15:50)을 상기시킨다. 클레멘스는 “너희 아버지처럼 온전하라”는 명령을 받는 “자에게는 육이 죽었다”고 단언한다.10) 이말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은 육에 나타난다는 말씀을 상기시킨다(고후 4:4). 이처럼 육은 죄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거슬리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표현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육에도 성령님이 거할 수가 있다는 진리를 이단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15:50에서 바울이 한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작품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물론 성경은 육을 따라서 사는 자들은 죽었다고 선언한다(마 26:41). 그러나 정화시키고, 하나님의 생명에로 끌어올리는 성부의 성령님을 모신 자들은 정결하며, 영적이고, 하나님께 산자들이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의 연약함이 삼킨 바된 자들은 더 이상 육적이지 않다. 성령님을 받은 자들은 육의 본체를 상실하지는 않지만, 행위의 열매의 질을 변화시킨다. 구원받은 자만이 완전한 인간(homo perpectus)이다. 성령님 안에 거한다는 것(롬 8:9)은 육을 벗어던지는 것이 아니라, 육을 성령님께 참여함시킴으로 가능하여 진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육의 실체로 이루어졌으니, 우리 또한 육의 부활을 누리게 될 것이다.11) 즉 하나님을 대항하는 전인적인 모습이 이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영적 모습으로 변화되었고, 또 부활할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육은 썩을 수도 있고, 썩지 않을 수도 있다. 육과 성령, 육과 하나님은 본래 서로 대치한다. 그렇지만 성령으로 인하여 새로운 삶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르는 부활의 삶이 육에서도 가능하여진다.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육이 성령과 부활로 승화된다.

우리는 고대교회의 육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아타나시우스(295-373)의 기독론적인 말로써 정리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중에 거하시고 모두에게 구원을 시중들고 선물하실 때, 우리에게 구원이 되셨고, 생명과 화해가 되셨다. 우리를 위하신 당신의 경륜은 천사들보다 나으며, 길과 부활이 되셨다.”12) 고대 저자들이 육의 부활에 관심을 둔 것은 먼저, 이 부활이 신앙의 핵심일 뿐아니라, 나아가 이원론의 위험 앞에서 육이 편파적으로 이해되고 곡해되는 것을 근절하기 위해서였다.

      

‘육의 부활을 믿사오며’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썩어질 것으로부터의 부활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도리어 ‘육으로부터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로마/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육의 부활은 모순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바울은 全人의 부활을 가르친다. 또 그가 육을 부활에서 제외시키는 이단들의 이원론을 가르친 적이 결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고대교회가 ‘육의 부활’을 고백하는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으며, 지극히 바울的이라 하겠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전인으로서의 육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부활한다.13)

선한 창조와 말씀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은 고대교회가 육의 부활을 고백한 근거이다. 성령과 원수였던 육을 가진 우리는 성령 안에서 우리 육을 정결하게 잘 간수해야 한다는 윤리적 교훈도 육으로 오신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다. 나아가 고대교회는 이원론이 교회 안에 침투할 때 이 육의 부활을 신앙고백에 도입하여 이원론을 근원적으로 제거하였다. 비록 현대의 기독신자들이 유치한 이원론과는 무관하다 하더라도, 육과 몸을 쉽게 더립힐 수 있는 위험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의 부활을 믿으면서 육을 성령 안에서 잘 간수해야 한다.14)





약어표

MPG Patrologia cursus completus, Series Graeca, accurante J.-P. Migne. Paris 1857-66.

MPL Patrologia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accurante J.-P. Migne. Paris 1841-64.

WA  M. Luthers Werke.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eimarer Lutherausgabe. Weimar Weimar-Köln-Tübingen 1883ff.



 
 
주.

1) W. Trillhaas, Das apostolische Glaubensbekenntnis, Witten/Ruhr 1953, 96-98. A.C. McGiffert, The Apostle's Creed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02), 169.

2) Polycarpus, Epistola ad Philippenses, vii, MPG 5, 1012B; Justinus, Dialogus cum Tryphone Judaeo, lxxx, MPG 6, 665A; Tatianus, Oratio adversus Graecos, vi, MPG 6, 817B; Theophilus Antiochenus, Ad Autolycum I, 7-8, MPG 6, 1036B.

3) Clemens I, Epistola 1 ad Corinthios, xxvi, MPG 1, 265B. 사실 70인역은 “나의 이 가죽이 썩은 후에 내가 하나님을 보리라”로 번역되는 욥기 19:26에서 ‘육’을 사용하지 않는다.

4) Tatianus, Oratio, xv, MPG 6, 837A; Pastor, v,7, MPG 2, 963; Clemens I, Epistola 2 ad Corinthios, vii-ix, MPG 1, 3341B; Ignatius, Epistola ad Smyrnaeos, iii, MPG 5, 709A.

5) 예루살렘의 신앙고백에서도 육의 부활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육의 부활의 고백이 반드시 反노스틱적 대응으로 고백에 삽입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Cyrillus Hierosolymitanus, Catecheses, XVIII, xxii & xxviii, MPG 33, 1053A-1056B.

6) Justinus, Fragmenta ex libro de resurrectione, ix, MPG 6, 1588C.

7) Irenaeus, Contra haereses, I,22,1, MPG 7, 670A; V,20,1, MPG 7, 117B; cf. I,27,3, MPG 7, 689A; I,10,1, MPG 7, 549A-B; V,2,2, MPG 7, 1124B.

8) Tertullianus, De resurrectione carnis, ii, MPL 1, 798A; De virginibus velandis, I, MPL2, 889B; Adversus Marcionem, V,vii, 486B.

9) ‘육’은 ‘rf'b'’의 역어로서 단지 외적으로 나타나는 全人을 말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하나님과 대치하면서 연약성과 허무성 중에 있는 全人을 말한다, J.A.T. Robinson, The Body: A Study in Pauline Theology (London: SCM, 1952), 17-26; cf. J.C. Beker, Paul the Apostle: The Triumph of God in Life and Thought (Edinburgh: T & T Clark, 1980), 286-287. 이에 비하여 ‘몸, 육체’(육체; sw/ma)의 어의는 포괄적이며, ‘육, 육신’과는 달리 인간의 연약성이나 허무성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Robinson, 31.

10) Athenagoras, Legatio, 31, MPG 6, 961C; Clemens Alexanrinus, Stromatum, IV,22, MPG 8, 1348B.

11) Irenaeus, Contra haereses, V,vi,1, MPG 6, 1138B; V,viii,1, 1141C; V,vii,1, 1139C.

12) Athanasius, Contra Arianos, I,64, MPG 26, 145B.

13) 루터도 육을 관능적 쾌락이나 정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 밖에 있는 인간으로 보았다: “Ex quo loco claret, carnem non modo pro sensualitate seu concupiscentiis carnis accipi, sed pro omni eo, quod extra gratiam et spiritum Christi est”, Luther, In epistolam Pauli ad Galatas Commentarius, WA 2,500,21-22 (갈 3:3). 그는 인간을 육,혼,영의 부분으로 나누지 않고, 전인으로 본다: “Ego mea temeritate carnem, animam, spiritum prorsus non separo. Non enim caro concupiscit nisi per animam et spiritum, quo vivit, sed spiritum et carnem intelligo totum hominem, maxime ipsam animam”, ibid, WA 2,585,31-33 (갈 5:17).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지하고 사도신경을 따라서 육의 부활을 기도해야 한다: “Sic debemus orare in Symbolo: 'Ecclesiam Sanctam', 'resurrectionem carnis', quam expectamus”, Predigten des Jahres 1532, nr. 5, WA 36,550,6-7.

14) 한역 사도신경에는 ‘육의 부활’ 뿐 아니라 또 다른 오역과 고쳐야 할 부분이 많이 있다. 유해무, 「개혁교의학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9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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