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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무. "종교다원주의와 삼위일체론"
 

종교다원주의와 삼위일체론



유해무 연구위원

(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잠실중앙교회 협동목사)



우리는 종교다원적인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Ⅰ. 우리 나라는 선교 초기부터 종교다원적 상황이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종교상황'이다. 불교, 유교, 기독교와 같은 세계종교들이 공존하면서도 어느 하나도 한국의 문화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 있지 않다. 이런 상황은 일본이나 중국, 구미의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1세기 전 조선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종교다원주의를 다루려고 할 때, 이런 사실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다. 즉 여러 세계종교들 뿐 아니라 다양한 민족 종교들이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각각 진리와 구원을 주장한다는 사실 만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만 '서술적 다원주의'라 부를 수 있다. 이 다원주의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다원주의라 불려지지 않는다. 비록 종교의 다원성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이 다양성을 부인하는 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서술적인 다원주의는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삶의 환경이었다. 이에 반하여 종교다원주의는 이런 다원적 상황과 종교들의 주장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자는 입장이다. 본고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입장을 개괄하면서 이들의 주장을 신학역사에서 항상 논의되고 있는 삼위일체의 흔적과 비교하고, 이에 기초하여 종교다원주의를 평가하려고 한다.



II. 기독교가 타종교를 보는 안목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배타주의, 포괄주의 그리고 다원주의의 3가지 입장을 대별한다.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취하여 온 입장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배타주의라 불려진다. 이 입장은 사도행전 4:12, 요한복음 14:6 등에 기초하여 다른 종교와 신앙을 진리나 빛과는 무관한 오류와 흑암이라고 보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런 입장은 제도화 되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이 정착되었다. 신교의 배타주의의 대표자로는 바르트(1886-1968)가 언급된다. 바르트는 성경에 증거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라는 그의 신학의 주제의 관점에서 종교를 불신앙으로 보았고, 다른 종교들을 오류와 맹목으로 보았다. 그런데 종교다원주의논의에 있어서 이 입장은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이다.

이런 배타주의와는 달리 타종교와 신앙을 수용하면서도 거부하는 태도를 포괄주의라 할 수 있다. 이 입장은 타종교도 하나님이 현존하는 자리로서 이 또한 영적 능력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수용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렇지만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떠난 구원에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종교를 궁극적으로는 거부한다. 유스틴은 모든 인간은 우주적인 로고스에 참여하는데, 이 로고스는 곧 그리스도이라고 한다. 타종교가 지닌 진리성은 이미 이 로고스의 산물이니까, 인간들이 제 아무리 무신적인 삶을 살아도 그들은 이미 기독신자들이라는 입장이다. 유스틴의 이 입장은 구교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제2 바티칸공의회가 타종교에 대하여 취한 공식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카톨릭교회는 타종교가 보여주는 진리와 거룩을 거부하지 않으며 도리어 존중한다. 비록 이것이 카톨릭교회의 교리와 다르지만, 만인을 비추이는 진리의 빛이 타종교에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만이 길이요 진리시오, 그 안에서 하나님은 만물을 당신과 화해하셨다(요 14:4, 고후 5:18 이하). 그럼에도 자신들의 잘못이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교회를 알지 못하면서도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며, 그들 중에서 존재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복음에의 준비 단계(praeparatio evangelica)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III.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대립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독특성에 대한 입장에서는 공동 보조를 취한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신앙고백적인 자세를 포기할 수도 있다. 종교다원적인 상황과 세계종교들에 대한 지식이 증가된 상황에서 다원주의는 다원적 상황이 안고 있는 제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기독교진리에 대한 재해석 및 재평가와 이에 근거한 진리 포기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입장을 우리는 '규범적인 정향적 종교다원주의'라 부를 수 있다. 이것은 가치체계의 고유성을 지닌 종교다원성을 서술적으로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종교다원성을 정당한 상황으로 해석하고 옹호하려는 입장을 말한다.

이 종교다원주의는 전통적인 신론과 기독론에 상당한 변화를 시도한다. 종교다원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의 신학을 전개함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한 다원성을 정당하게 인정하려 함에 있다. 굳이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에 '실재(the Real)'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의 신학을 시도하려는 자들은 상대주의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려고 한다.



이 다원주의의 대표자로 죤 힉(J. Hick; 1922-, Birmingham, Claremont Graduate School의 종교철학교수)을 들 수 있다. 즉 그는 그리스도나 기독교 등 종교가 아니라 종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체험되는 하나님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이 빛과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며 모든 종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종교다원주의란 자아중심에서 실재중심에로의 인간존재의 변혁이 모든 위대한 종교 전통 안에서 여러 가지 다른 방식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견해이다. 다양한 종교 전통은 모두가 인간이 거기에서 구원, 해방, 완성을 발견할 수 있는 구원론적 장소 또는 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힉의 전제는 종교 체험은 하나의 궁극적인 신적 실재와의 진정한 조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재를 인간의 언어로 제한할 수 없다. 실재는 인간의 생각과 사변을 초월한다. 우리 마음에 파악할 수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이미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종교체험은 특히 지형적,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이 다양한 경험들은 상호 보족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에 대한 개방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과 제한적으로 이해된 하나님을 구별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개념화를 초월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인격적이든 비인격적이든 인간의 인지를 통하여 경배를 받으며 연관된다.



그런데 이런 거룩성에 대한 체험이 이루어지면, 이는 절대자의 성격을 지니며, 이를 쉽게 신학적 교리로 변모시켜 신성시할 수 있다. 이것이 종교 간의 알력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기독교에서 이 절대성은 하나님이 참신과 참인간인 나사렛 예수 안에서 궁극적으로 계시하셨다는 성육신론에서 성역화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를 종교 전반의 중심으로 보며 기독교를 하나님에게로 가는 최종적인 길로 단언하는 것은 그의 신중심의 종교다원주의와는 상충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힉은 물론 예수가 구원을 이루었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길임에는 틀림 없으나,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한 그리스도라고 본체론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단언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이 그가 성육하신 하나님이라는 투의 신화적 어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전통적인 기독론을 거부하고 재해석한다. 이리하여 힉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나타난 것만을 말할 뿐,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다. 또 그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한 죄에서의 해방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면 믿음에 의한 제한적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 때에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의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힉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중심으로 사로잡혀 가는 완성의 정도로 이해한다. 예수는 하나님께 스스로를 열어놓아 온전히 신성을 드러냄으로 더욱 온전한 인성을 완성시켰다. 즉 예수는 온전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더욱 온전한 참 인성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



힉보다 연장자이면서 같은 입장을 취하는 종교학자로서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1916-, Panjab, McGill, Havard대학교)가 있다. 그는 종교와 종교들을 구별한다. 전자는 인격적인 신앙을 말한다면, 후자는 축적된 전통이라 부를 수 있다. 전자는 후자를 생산한다. 동시에 전자는 종교진리의 진정한 좌소로서 상이한 종교들의 신도들을 연합시키는 요인이다. 나아가 그는 하나님이 상이한 종교공동체들 가운데서 다양하게 일했고 종교전통의 다양한 모습 가운데서 구원사역을 행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관심도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에로 바뀐다.



길희성은 스미스의 제자로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입장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중심 또는 실재중심의 신학을 제안한다. 그는 종교다원주의의 도래를 진리 인식의 상대성과 진리 인식을 위하여 대화가 지닌 필연성을 역사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나아가 신학적 이유들을 제시한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든다. 언어를 초월하는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언어는 계시 언어까지 불완전함을 깨우쳐 준다. 언어를 포함한 상징은 실재가 아니다. 구원에 합당한 만큼의 계시만이 주어진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다른 종교에도 더 큰 진리가 있음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 역시 자기 부정을 통하여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제한된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다원적종교는 하나님중심일 수밖에 없다. 또 하나님의 유일성을 들 수 있다.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신론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생명의 뿌리인 하나님은 그들의 역사와 체험 속에서도 활동하신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은 만인의 구원을 원한다. 선택이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 하나님의 편파성을 말하는 것을 아니다. 따라서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보다는 익명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변선환은 주로 로마교신학자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포괄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타종교를 '복음에의 준비'(praeparatio evangelica)로 보았다. 이에 근거하여 선교의 과제는 배타적 정복이 아니라 열려진 대화와 협력의 선교로 규정하였다. 1984년 이후부터 그는 힉 등을 따르는 신중심적인 다원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보편적(우주적)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를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후자를 구원의 절대적 규범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보기 시작하였다. 여기다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알기 전에 이미 '기독교인의 가슴 속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마호메트교인들과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져서 만인에게 선행 은혜가 주어졌고 구속의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본 웨슬리의 선행은혜론을 크게 원용하였다. 즉 하나님은 만인을 사랑하시니까, 우주적 그리스도는 온 인류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가능하게 하신다. 따라서 어느 종교라도 동일 실재에 이르는 다양한 길이며 각각 선교적 과제를 선의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교회 중심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면서, 교회 바깥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91년 10월 교단특별총회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IV.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강조점을 이전시킨다. 먼저 다원주의의 그리스도 이해를 비판적으로 살피려고 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종교 다원적 상황을 직시하고서 고민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타종교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증가되면서 다인종,다문화와 다종교로 구성된 미국과 같은 상황에서 종교다원주의가 발흥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서구교회가 비어가며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상당수가 동양종교에 몰두하는 상황을 염려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의 배경에 있는 고민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제시하는 주장에는 많은 문제가 깔려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그리스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에로의 전이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들은 이를 위하여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큰 변화를 시도한다. 중심의 이동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의미는 크게 약화되거나 변형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최종적으로 계시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또 예수의 신성과 성육신론을 '신화'라고 규정한다. 힉은 예수를 말씀의 성육신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이 예수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많은 상징적, 신화적 모델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그의 이 말은 고대교회에서 형성된 신론과 기독론 교의를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이 말은 더 소급하여 신약성경 자체에 대한 비평적 방법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는 말이다. 즉 그는 예수는 그 자신을 메시야나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지 않았으며, 다른 이들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비록 그리스도중심이라는 말을 고수한다 하더라도 이 말은 교리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내세운다거나 그리스도라는 말에 불들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중심의 삶은 나의 나 됨이 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의 은덕임을 깨닫게 한다. 이때 그리스도는 신앙인이 하나님과 온 우주 그리고 만물과 더불어 하나 됨을 이루도록 이끄는 방편이 된다. 이때 그리스도의 역할은 가장 온전하게 완성되며, 이런 역할을 행하는 직무를 그리스도라 칭한다. 성육신을 신화로 보아서 역사적 예수의 의미를 약화되듯이, 이런 식의 방편기독론은 그리스도를 직무로 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상대화시키고, 수많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이런 주장에 대한 캅(J. Cobb)의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고 하겠다. 그는 그리스도 중심의 포괄주의자이다. 그는 이전의 다른 포괄주의자와는 달리 다원주의자들의 논리를 설득력있게 반박하면서 다원주의의 대안으로서 포괄주의를 제시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는 다원주의가 주장하는 공동기반인 신 또는 실재의 제시가 유대교나 회교와 관련해서는 장점이 있으나, 불교의 궁극 관심인 공(空)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진정한 다원주의는 공통기반에 대한 물음 자체를 포기함이어야 한다고 본다. 게다가 설혹 공통기반이 있다하더라도 이를 대화의 선행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결국 각 전통의 독특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다원주의가 상호배움과 상호발전을 도모하려고 하지만, 공통기반에 대한 강조는 결국 배움의 기회를 축소시킨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변혁의 좋은 기회는 각 전통의 독특성과 차이로부터 온다. 그는 기독교의 배타적인 주장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한다. 이는 우월주의나 배타주의를 회복시킴이 아니라 다른 전통들이 기독교로부터 배울 기회가 있도록 하라는 말이다.

캅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파악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향해 철저히 열려진 삶을 살았던 규범적 실재로 이해한다. 이 독특성으로 인하여 구원의 특수성과 창조적 변혁의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나의 나됨에 주체적인 양식이 된다. 그리스도를 주체적 양식으로 삼는다는 것은 나의 질과 모습을 그리스도로 삼자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개방성은 그가 의존하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말하는 열려진 미래와 잘 어울려진다. 화이트헤드는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뜻과 은혜가 시작하며 수 많은 요인들에 의하여 나는 이루어져간다. 그는 실체보다는 생성을 말한다. 이런 생성과정 중에서 나에 의하여 얻어진 모든 가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과정철학의 논조를 따르면서 캅은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를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개방성으로 무장하고서 다른 종교들을 본다. 그는 불교의 혜탈이 불교도에게 큰 의미가 있다면, 기독교는 불교의 혜탈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본다. 동시에 기독교도 배움을 베푼다. 이런 교호 과정에서 다른 종교의 진리들을 잘 흡수하여 기독교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이 기독교를 통합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정말로 역사가 멈추지 않고 충분히 오래 흘러간다면,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 한계를 벗어 날 수 있다면, 언젠가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무장하고서 종교간의 대화를 하여서, 기독교의 생명력을 회복하자는 것이 그의 전략이다.

우리가 비록 캅의 입장을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중심의 그의 입장은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좋은 비판적 안목을 제시하는 것을 틀림 없다.



V. 이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를 삼위일체론의 관점에서 평가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중심을 약화시키거나 변질시킨 것은 하나님중심신학을 지향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기독론으로 이해된 하나님은 누구일까? 힉은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에 '실재'라는 말을 제안한다. 더러는 심지어 실재의 인격성 여부도 난외로 부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중심적인 종교다원주의의 기조는 기독교역사 초기에 나타났던 군주론(君主論)을 연상시킨다. 물론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군주론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관심은 없다. 그러나 예수를 半神半人으로 만드는데에서 그들의 관심사에 유사점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유스틴(Justinus the Martyr, 100-165)과 오리겐(Origenes, 185-254) 등은 그리스도를 '二等 하나님'으로 보았다. 이런 식의 다원론은 君主論의 반격을 초래했다. 군주론은 성자의 신성을 파생적으로 보거나 아니면 성부의 外現 방식으로 보았다. 전자는 2세기에 강했는데, 인간 예수 안에 비위격적인 신적 능력이 역사하여 그를 세례나 부활 시에 성자로 입양시켰다는 입장인데 이는 예수를 '반신반인'으로 만들었다(동력적 주권론). 후자는 200년경 유행했는데, 성부만이 위격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의 외현 방식으로 보면서,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 대표자는 사벨리우스(Sabellius, 215년경)인데, 그는 '성자-성부'라는 표현을 썼다(양태론적 주권론). 주권론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키려는 좋은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이 단일성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개진했다.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의 단일성에 관심을 두지는 않지만, 예수의 존재를 신화적으로 해석함으로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신중심주의를 표방하는 데에서 유사한 공통점이 나타난다. 고대의 다원론은 군주론의 반격을 받았지만, 현대의 다원론은 군주론 그 자체이다. 어쨌든 종교다원주의의 관심은 기독교역사에서 나타난 힘든 투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겠다.

어쨌든 하나님 또는 실재에 대한 그들의 관심 전향은 무신론을 대항하는 유신론의 노력처럼,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대답의 독특성을 상실한다. 즉 그 하나님은 미분화된 하나님, 곧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아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인간이 발견, 정리한 삼위일체 교리를 신의 속성으로 전제하는 것 자체를 문제라고 비판한다. 힉이 비판하듯이 설령 삼위일체론 교의 형성 과정에 대한 비판은 가능할런지 모르지만, 이들은 이런 말로써 삼위일체론은 말할 것도 없고 실상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기독교회 초기역사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였던 삼위일체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단군신화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윤성범의 토착화신학의 시도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 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기독교의 독특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종교다원주의를 옹호하며 타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가? 이점에서 종교다원주의는 배타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포괄주의 보다 더 과격한 운동임을 알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논의에서 성령에 관한 언급을 찾아보기 쉽지 않는데, 이점은 종교다원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기독론이 아니라 기독론을 전제한 성령론에 입각한 포괄주의를 시도할 수는 없을까?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준비시킨 이로서 그리스도가 찾아온 자들도 준비시키시는 분이다. 그러나 문화나 종교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라 꾸중과 경책을 받아야 마땅하다. 이 점에서 비기독교적 종교들을 동정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을까?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였도다.'(행 14:15-16) 이런 복음전도는 다원주의자들이 비판하듯이 제국주의의 전횡이 아니라 '온유와 두려움'(벧전 3:16)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독자의 변증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이 점에서 예수 이름에 근거한 내용적 배타주의는 방법적 포괄주의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대화가 때로는 새로운 선교의 방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교와 전도에 의한 개종은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역사에 속한다. 진리의 영인 성령님은 모든 문화와 종교를 초원하여 종교의 본질을 드러내며, 모든 문화나 종교가 지니는 비본질을 심판하신다.

다원주의는 개별성을 존중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각 종교의 정체성과 특수성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이는 무책임한 혼합주의를 금하며 도전과 충격을 줄 수는 있다. 우리가 다원성을 거절할 수 없는 한, 다원주의의 한 양태로서 종교 간의 대화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 등은 다른 종교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심적인 종교다원주의를 결코 수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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